시험에서 71점을 받았다고 상상해보세요. “잘했다"고 하기엔 아쉽지만, “노력했다"고 하기엔 충분한 점수죠.

프랑스의 대형 유통기업 카르푸(Carrefour)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법정에서 “우리 웹사이트는 프랑스 접근성 표준의 71%를 준수하고 있습니다"라고 항변했으니까요.

법원의 대답은 간결했습니다.

“전자상거래 사이트는 어느 정도 접근 가능해서는 안 된다. 완전히 접근 가능해야 한다.”

2026년 6월 4일, 프랑스 캉(Caen) 법원은 카르푸에 6개월 안에 웹사이트와 모바일앱을 완전히 접근 가능하게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기한을 넘기면 하루에 500유로씩 강제금이 쌓입니다. 유럽접근성법(EAA) 체계에서 나온 최초의 이행 강제 판결입니다.

이 판결이 왜 중요한지, 유럽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한국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저울 위에 놓인 71%와 100% - 접근성 71%는 접근성이 아니라는 카르푸 판결을 상징하는 일러스트
저울 위에 놓인 71%와 100% - 접근성 71%는 접근성이 아니라는 카르푸 판결을 상징하는 일러스트

유럽접근성법(EAA), 3분 요약

먼저 배경 지식부터 채우고 가겠습니다. 이 글만 읽어도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요.

유럽접근성법(European Accessibility Act, EAA)은 EU 지침 2019/882의 별칭입니다. 2019년에 채택되어 2025년 6월 28일부터 회원국 전역에서 시행됐습니다. 핵심은 간단합니다.

장애인이 제품과 서비스를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적용 범위가 꽤 넓습니다. 웹사이트만이 아니라 서비스와 제품 전반을 다룹니다.

  • 전자상거래 (온라인 쇼핑몰 전반)
  • 은행·금융 서비스
  • 교통·공연 티켓 발권 (온라인 및 키오스크)
  • 통신 서비스
  • 전자책과 전용 뷰어
  •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기술 기준으로는 유럽 조화 표준인 EN 301 549를 사용하는데, 웹 콘텐츠에 대해서는 사실상 WCAG 2.1 AA와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몇 가지 중요한 예외와 유예도 있습니다.

  • 영세기업 예외: 직원 10인 미만이면서 연매출 200만 유로 미만인 서비스 사업자는 의무에서 제외됩니다.
  • 기존 서비스 유예: 2025년 6월 28일 이전부터 제공되던 일부 서비스·제품은 2030년 6월 28일까지 전환 기간이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EAA가 역외 기업에도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EU에 본사가 없어도, EU 소비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대상이 됩니다. 한국 기업도 예외가 아니라는 뜻이죠.

카르푸에 무슨 일이 있었나

이번 판결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게 아닙니다. 약 1년에 걸친 타임라인이 있습니다.

2025년 6월 EAA 시행부터 2026년 12월 이행 기한까지의 타임라인 인포그래픽 - 최고장, 가처분 신청, 판결로 이어지는 1년의 기록
2025년 6월 EAA 시행부터 2026년 12월 이행 기한까지의 타임라인 인포그래픽 - 최고장, 가처분 신청, 판결로 이어지는 1년의 기록

2025년 7월 7일, EAA 시행 열흘 만에 프랑스의 장애인 단체들이 움직였습니다. 시각장애인 지원 단체 apiDV(‘시각장애인과 동행하고, 지지하고, 통합한다’는 뜻의 머리글자)와 장애 인권 단체 Droit Pluriel(드루아 플뤼리엘, ‘다원적 권리’)이 공익 소송 단체 Intérêt à Agir(앵테레 아 아지르)의 지원을 받아, 4개 대형 유통기업 — 오샹(Auchan), 카르푸(Carrefour), 르클레르(E.Leclerc), 피카르(Picard) — 에 접근성 준수를 요구하는 최고장을 보냈습니다.

참고로 Intérêt à Agir는 프랑스 소송법 용어로 ‘소의 이익’, 그러니까 소송을 제기할 자격을 뜻합니다. 단체 이름부터가 “우리는 소송할 자격이 있다"인 셈이죠. 작명부터 진심이었습니다.

2025년 9월 1일까지 시정하라는 요구에 대한 응답이 불충분하자, 2025년 11월 긴급 가처분을 신청했습니다.

결과는 갈렸습니다. 2026년 5월 오샹 건에서 법원은 미준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긴급 구제는 기각했습니다. 그런데 2026년 6월 4일, 캉 법원(Tribunal judiciaire de Caen)은 카르푸에 대해 전혀 다른 판단을 내렸습니다.

판결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데이터 표
항목내용
대상carrefour.fr 웹사이트 및 모바일앱
명령6개월 내 완전한 접근성 확보
강제 수단기한 초과 시 일일 500유로 강제금(astreinte)
손해배상인정하지 않음
법적 근거프랑스 소비자법 L.412-13조 (EAA의 국내법 전환 조항)

손해배상 없이 “고쳐라"에 집중한 판결이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벌을 주는 게 아니라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목적인 거죠.

“71% 준수"가 법정에서 통하지 않은 이유

카르푸의 항변은 사실 꽤 성실한 편이었습니다.

  • 프랑스 접근성 표준 RGAA 기준 71% 준수 달성
  • 이전 연도 대비 꾸준한 개선 실적
  • 시각장애인 테스터가 참여하는 내부 접근성 검증 조직 운영
  • 2026년 말까지 100% 준수 달성 계획 보유

RGAA(Référentiel Général d’Amélioration de l’Accessibilité, ‘접근성 개선을 위한 일반 기준’)는 WCAG 2.1 AA를 기반으로 한 프랑스의 국가 접근성 평가 기준입니다. 그 기준으로 71%면, 솔직히 국내외 많은 사이트보다 나은 수준입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 모든 노력을 인정하면서도 결론은 바꾸지 않았습니다. 판결의 핵심 논리는 이 한 문장입니다.

접근성은 수단 의무(obligation de moyens)가 아니라 결과 의무(obligation de résultat)다.

수단 의무와 결과 의무를 대비한 다이어그램 - 노력의 증명이 아니라 누구나 쓸 수 있는 결과가 기준이라는 판결 논리
수단 의무와 결과 의무를 대비한 다이어그램 - 노력의 증명이 아니라 누구나 쓸 수 있는 결과가 기준이라는 판결 논리

법률 용어라 낯설 수 있는데,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 수단 의무: 목표 달성을 위해 성실히 노력했다면 의무를 다한 것 (예: 의사의 진료)
  • 결과 의무: 노력과 무관하게 약속된 결과가 나와야 의무를 다한 것 (예: 택배의 배송)

법원은 접근성을 후자로 봤습니다. “열심히 개선하고 있어요"는 답이 아니고, “지금 장애인이 이 사이트에서 장을 볼 수 있는가” 만이 답이라는 겁니다.

“계획은 있었어요"가 통하지 않는 세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나요? 네, 방학숙제 검사 날의 그 기분입니다. 개발자에게는 “로컬에서는 됐는데요"가 배포 장애 앞에서 힘을 잃는 순간과도 닮았고요.

이 판결이 세운 기록도 정리해두겠습니다.

  1. EAA 체계에서 유통기업에 시정을 명령한 최초의 판결
  2. 모바일앱을 명시적으로 판결 대상에 포함한 최초의 사례
  3. 부분 준수(71%)를 미준수로 판단한 명확한 선례

특히 두 번째가 실무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동안 접근성 논의가 웹 중심이었다면, 이제 앱도 같은 저울에 올라간다는 게 판례로 확인된 셈이니까요.

유럽 전체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카르푸 판결은 상징적인 사건이지만, 사실 유럽 곳곳에서 비슷한 흐름이 진행 중입니다. EAA 시행 1년, 각국의 집행 현황을 보면 이렇습니다.

  • 독일: EAA 전환법(BFSG) 시행 직후부터 로펌들이 경쟁법을 근거로 경고장(Abmahnung)을 발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규제기관을 기다리지 않고 민간이 먼저 움직이는 구조입니다.
  • 스웨덴: 우정통신청(PTS)이 2025년 10월 대형 전자상거래 기업을 상대로 첫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접수된 공식 민원만 124건입니다.
  • 네덜란드: 소비자시장청(ACM)이 EU 밖 기업을 포함한 전 세계 전자상거래 사업자에게 자료 제출을 요구했고, 2026년 하반기 공식 집행이 예상됩니다.

과태료 상한도 나라마다 만만치 않게 설계돼 있습니다.

데이터 표
국가제재 수준
독일위반당 최대 10만 유로
스페인최대 100만 유로
이탈리아최대 100만 유로
네덜란드최대 90만 유로 또는 연매출의 10%
아일랜드최대 6만 유로 + 형사책임(최대 6개월) 가능

한편 대서양 건너 미국은 결이 조금 다릅니다. 2026년 4월, 미 법무부(DOJ)는 공공기관의 웹 접근성 의무(ADA Title II) 이행 기한을 연장했습니다. 장애인 단체들은 강하게 반발했죠. 유럽이 액셀을 밟는 동안 미국은 브레이크에 발을 올린 모양새입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일까요?

“프랑스 마트 이야기가 나랑 무슨 상관이지?” 싶으실 수 있습니다. 불구경하기엔 불씨가 생각보다 가깝습니다.

공교롭게도 카르푸 판결 두 달 전인 2026년 4월, 한국 대법원에서도 놀랍도록 닮은 판결이 확정됐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지마켓·이마트(SSG닷컴)·롯데쇼핑을 상대로 10년 가까이 이어온 소송에서요.

  • 온라인 쇼핑몰이 상품 이미지에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장애인차별금지법상 간접차별
  • 개별 판매자가 등록한 상품 정보라도 플랫폼 사업자가 접근성 보장 의무를 짐
  • 판결 확정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화면 낭독기로 쇼핑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게 하라

프랑스도 6개월, 한국도 6개월. 두 나라 법원이 같은 숙제를 같은 기한으로 내준 셈입니다.

다만 차이도 뚜렷합니다. 한국 대법원은 위자료(1인당 10만 원) 지급 부분을 기각해 배상 없이 시정 명령만 남겼고, 프랑스처럼 일일 강제금 같은 이행 압박 장치도 붙지 않았습니다. 원고들이 헌법재판소에 재판소원까지 낸 이유입니다. 시정을 명령하는 데까지는 왔지만, “안 지키면 어떻게 되는데?” 에 대한 답은 아직 한국이 더 약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국내 웹의 현주소를 보면, 시정할 것이 많습니다. 2025년 웹사이트 정보접근성 실태조사에서 국내 웹사이트의 대체 텍스트 준수율은 17.1% 에 그쳤거든요. 이 조사 결과는 이전 포스트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개발자인 우리가 챙길 것

판결문을 덮고 나면, 실무자에게 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뭘 해야 하지?”

① “부분 준수"를 목표로 잡지 않기

이번 판결의 교훈은 71%가 낮아서가 아니라, 접근성이 퍼센트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크린 리더 사용자가 장바구니까지 갔는데 결제 버튼을 못 누른다면, 나머지 99%가 완벽해도 그 사용자에게 이 서비스는 0%입니다. 준수율은 관리 지표일 뿐, 사용자의 경험은 여정 단위로 평가해야 합니다.

② 핵심 사용자 여정부터 끝까지 통과시키기

전체 페이지를 한 번에 100%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검색 → 상품 확인 → 장바구니 → 결제” 같은 핵심 여정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조기술로 완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 시작할 수 있습니다. 법원이 본 것도 결국 “장을 볼 수 있는가"였습니다.

③ 앱도 웹과 같은 기준으로

모바일앱이 판결 대상에 명시된 이상, “앱은 나중에"라는 우선순위 설정은 위험해졌습니다. 접근성 검증 프로세스에 앱이 포함되어 있는지 점검해보세요.

④ 개선 중이라는 기록보다, 막히는 지점의 제거

카르푸는 개선 실적과 계획을 성실히 증명했지만 결과 의무 앞에서는 소용없었습니다. 로드맵 문서보다 실제 차단 지점(blocker) 하나를 없애는 것이 법적으로도, 사용자에게도 더 가치 있습니다.

마무리

유럽접근성법 시행 1년의 결산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접근성이 “권고"에서 “채무"로 바뀌었다.

노력을 증명하는 시대에서, 결과를 검증받는 시대로요. 그리고 한국의 대법원 판결이 보여주듯 이 흐름은 유럽만의 것이 아닙니다.

71%라는 숫자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개발팀 입장에서는 “많이 왔다"는 숫자지만, 스크린 리더 앞에 앉은 사용자에게는 “10번 중 3번은 벽에 부딪힌다"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법원은 후자의 자리에서 판결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서비스는 어느 자리에서 평가받게 될까요. 판결문이 아니라 사용자의 완주로 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 자료